봉정암 성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 있는 말라족의 사라나무 숲에서 입멸(入滅)하시자 말라족
사람들은 남녀노소가 모두 놀라워하고 슬퍼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그들은 향과 꽃다발, 온갖 악기와 오백겹의 천을 가지고 와서 사라나무 주위에 모여들었고,
주악(奏樂)과 꽃다발과 향으로 부처님의 유체를 공경하며, 천막을 치고 만다라화를 바치며 6일 동안 공양하였다.
새 헝겊과 마포로 번갈아 오백겹으로 둘러싸인 후 쇠 기름관에 넣어진 부처님의 유해는 7일만에,
'머리를 감고 새 옷을 입은 8명의 말라족 수장(首長)들'에 의하여 쿠시나가라 북문을 통해 시내에 들어갔다가
동문을 통해 나와서, 동쪽 교외에 있는 마쿠바 반다나 차이타(천관사, 天冠寺)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마하가섭의 도착을 기다려, 향목을 태워서 다비하였다.
수행과 덕행이 뛰어난 고승들이나 재가신자가 죽은 후 다비를 하였을 때 나오는 구슬모양으로 된 것을 일컬어 사리라고 하는데, 원래 사리(산스크리트어,sarira의 음역)란 다비 후에 남은 유골을 의미했다. 사리는 크게 생신사리(生身舍利), 법신사리(法身舍利), 전신사리(全身舍利), 그리고 쇄골사리(碎骨舍利)로 나뉜다. 생신사리는 부처님의 유골을 말하며, 법신사리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교법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45년간 설하신 가르침이 모두 이 법신사리에 속하며 경전을 탑속에 모시고 공경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러 부처님 가운데 다보여래(多寶如來)께서는 온몸을 그대로 사리로 남기셨는데, 이러한 경우를 일러 전신사리라 하며, 다보탑이란 바로 다보여래의 사리탑이란 뜻이다.
쇄골사리는 시신을 다비한 다음 진주나 황금의 분말처럼 갈은 것을 말한다. 불자들이 탑돌이 행사를 하는 것은 그 안에 부처님의 영골인 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형(遺形)을 다비한 후 쇄신사리는 드로나라는 바라문에 의해 8개국의 부족들에게 분배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스투파(탑)가 각지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처음 부처님의 사리를 분배받은 사람들은 마가다국의 왕 아쟈타삿투(아사세),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카필라의 샤카(석가)족, 다마그리하의 콜랴족, 알라캅파의 부리족, 베타두비파의 바라문, 파바의 말라족, 그리고 쿠시나가라의 말라족이었으며, 배분을 결정한 드로나는 사리가 들어있던 병을 받아갔고, 뒤늦게 당도한 핍팔리바나의 모랴족은 남은 재를 가지고 갔다.
이렇게 하여 8개의 불사리탑과 한 개의 병탑(甁塔) 및 한 개의 회탑(灰塔)이 세워졌으며, 그 후 부처님의 사리는 다시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신앙되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98년 프랑스인 W.C.Peppe가 네팔 남쪽 국경지대인 피프라파(piprava)의 대스투파 유적을 발굴하던 중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발견하였는데, 사리병에는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병이다. 명예로운 석가족의 형제, 자매, 처자 등이 함께 받들어 모신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불전을 가리켜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께서 항상 그곳에서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적멸이란 한 마디로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말하며, 보궁(寶宮)이란 지혜와 자비의 공덕으로 건립된 보배궁전을 말한다.
그리하여 적멸보궁은 원래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인도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 보리도량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모든 장소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고, 나와 너, 인간과 자연, 부처와 중생, 그 외 모든 이분법적 양 극단을 떠나 하나되는 세계를 이룩한 부처님이 계시는 성전을 뜻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고 계신 곳으로써, 예불의 대상으로 따로이 불상을 봉안하지 않으며, 다만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다른 전각과 다른 점이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자장율사께서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모셔온 불사리와 정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근본으로, 오대산 상원사의 중대(中臺), 함백산 정암사의 수마노탑,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설악산 봉정암을 말하는데,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참배하여야할 성지 중의 성지(聖地)이다.
봉정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교구본사, 신흥사)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로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위치한다.
백담사에서 5-6시간 정도 산길을 올라가다보면 등산 전문가들조차 힘들어 하는 일명 '깔딱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를 넘어야 봉정암에 이른다.
백담사와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는 7-8시간의 산행은 전문산악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의지를 시험하는 구도의 길, 바로 그것이다.
그토록 험한 여정의 끝 저쪽에서 봉정암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를 하고 참배객들을 맞는다.
새가 살짝 날개를 편 듯한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암자의 오른쪽에 솟아있는 봉우리가 기린봉, 할미봉, 범바위 등이고, 절 뒷편 왼쪽에 보이는 것이 독성나한봉, 지장봉, 가섭봉 등이다.
해발 1,244미터에 자리한 봉정암은 지리산 법계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세워진 사찰로써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한 5층석탑, 이름하여 불뇌보탑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설악산 적멸보궁 봉정암
주 소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창건과 중창
봉정암의 창건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3.7일(21일)기도를 마치던 날, 문수보살이 현신하시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하였다.
신라로 귀국한 스님께서는 우선 양산 통도사에 보궁을 지어 사리를 봉안하고 금강산을 찾아갔다.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할 곳을 찾으려 함이었다.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풍광을 돌아보며 과연 사리를 모실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사리를 봉안하려 하니 어느 곳이 신령한 장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님은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이레째 되는 날,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어디선가 봉황새 한 마리가 스님의 기도처로 날아왔다.
스님은 봉황새를 따라 나섰다. 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몇날 며칠을 남쪽으로만 날아가던 봉황새가 드디어 어떤 높은 봉우리 위에서 몇 바퀴 원을 그리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스님이 봉우리 위로 올라가자 봉황새는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봉황이 사라진 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바위의 생김새가 꼭 부처님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봉황새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그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그 바위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지세를 관찰하니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곳이 사리를 모실 인연처임을 깨달은 스님께서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을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지으니, 선덕여왕 13년(644년)의 일이요,
설악산의 사찰 암자 가운데 가장 먼저 창건된 곳이다. 봉정암이 창건된 후 수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니, 부처님의 불뇌사리가 모셔진 까닭이다.
자장율사가 사리를 봉안한 장소는 여러 곳이지만 해발 천이백여 미터가 넘어가는 높은 산봉우리에 적멸보궁을 지은 곳은 이곳 설악산 봉정암 밖에 없다.
이는 이곳이 특별한 길지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하기 위해서는 깍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는 듯한 일심의 정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봉정암의 중창
봉정암은 창건 이후 지금까지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신라 문무왕 17년(667년)에 원효대사가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이곳에 잠시 머물며 암자를 새로 지었고, 고려 중기인 1188년에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참배하고 중건하였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스님이 1923년에 쓴 [백담사 사적기]에 따르면, 세 번째 중건이 조선 중종 13년에 환적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명종 3년(1548년)에 등운스님이 네 번째로 중수하였으며, 인조 10년(1632년)에 설정스님에 의해 다섯 번째로 암자가 중창되었음이 기록되고 있다.
특히 설정스님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를 만들었으며, 누각까지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 4년 계심스님에 의해 여섯 번째 중건이, 고종 7년(1870년)에 인공, 수산 두 스님에 의해 일곱 번째 중건이 이루어졌다.
그 후 6,25 동란 때는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고 5층 사리탑만 외롭게 남게되는 비운을 격기도 하였다.
1960년 법련스님이 천일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하였으며, 1985년부터는 6년여에 걸쳐 본격적이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결과, 청기와로 단장한 정면 5칸의 적멸보궁을 비롯, 일주문, 해탈문, 산신각, 요사채, 석등 등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며, 설악의 장엄을 받는 우리나라 제일의 기도도량이 되었다.
바위를 뚫은 불심(佛心)
-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한 불뇌보탑(佛腦寶塔) -
도대체 어떤 불심이 이 높은 설악산 정상에 이 같은 탑을 세우고자 했을까?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했다고 해서 불뇌보탑이라 불리는 봉정암 오층석탑 앞에 서면 절로 이같은 탄성이 터져 나온다.
고려시대 양식을 갖춘 이 석탑은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다. 일반적인 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어서 마치 바위를 뚫고 탑이 솟아 오른 듯하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설악의 온 산이 이 탑을 받들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설악과 이 탑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만난다.
탑의 몸체가 시작되는 자연암석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1면에 4엽씩 모두 16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님이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맨 위에는 연꽃이 핀 듯한 원뿔형 보주를 올려놓아 영원한 불심을 향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