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 대사가 개산(開山)하였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승병들의 집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임란 중에 소실 되었으나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 길상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라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현재의 주지 평산 성운 화상이 부임하여
경내에 위치한 마애여래입상이 천년 고불(古佛)임을 입증하여
보물로 지정받고 30여 년의 중흥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 산령각, 천태각, 연수원, 요사채 등의 건물과
세존진신사리탑, 지장보살입상, 종형사리탑, 관음보살상
, 5층 석탑, 중창비 등을 조성하여 현재의
문화재 전통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또한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도도량, 참회도량,
수행도량으로서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다.
그 밖에 사찰에서 2km 위쪽에 위치한 옛 삼천사 터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동종(銅鐘), 연화대좌(蓮花臺座),
석탑기단석(石塔基壇石),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동종은 보물로 지정받아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보물 제657호|
마애여래입상은 삼천사 경내 대웅전의 위쪽으로 30m 지점 계곡의
병풍바위에 각인되어 있다. 불상의 어깨 좌우에 큰 사각형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 앞에 목조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으며, 전체 높이는
3.02m, 불상 높이는 2.6m에 달한다. 고려시대 불상 중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된다.
얼굴과 윗몸은 돋을 새김을 하였으나 하반신과 광배 그리고 대좌는
볼록한 선새김으로 마치 강한 선묘화(線描畵)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광배[頭光]는 겹둥근 무늬로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살짝 뜬 눈은 눈꼬리가 귀 가까이 닿았으며,
두툼한 코와 연속된 양 눈썹 사이에는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뚫려 있다.
신광(身光)은 한 줄로 새겼다. 신체는 비교적 장신이지만 비례가 자연스러우며,
옷차림을 보면 양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의이나 넓게 'U'자 모양으로
트인가슴에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비스듬히 걸친 내의와 띠대들이 보인다.
법의는 다소 두껍게 나타내어 새로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수인을 살펴보면 오른손은 내려뜨려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으며,
왼손은 배 앞쪽으로 무엇을 가볍게 받들어 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발 밑의 대좌는 연꽃잎이 위쪽으로 피어난 앙련의 연화좌이며,
꽃잎은 단판 중엽이고, 꽃잎 사이에는 간엽이 표현되어 있다.
조성된 바위 위에는 또 다른 커다란 바위가 얹혀 있어
마치 불상의 보개(寶蓋)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상호가 원만하고
신체도 균형을 이루었으며, 옷자락도 부드럽게 표현되었고,
양각과 음각의 조화를 잘 살린 매우 우수한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