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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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을 밝히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불교계의 가장 큰 행사인 ‘부처님 오신 날’이 단순히 불교인만의 축일이 아니라 공식적인 국가적
축일이 된 것은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전통을 되살린다는 입장에서도 의의있는 일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가서 소원을 담은 등을 달고, 그 중에 일부는 이 날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온 누리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자비가 광명으로서 두루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는
연등행사에 참가하기도 한다. 연등燃燈이란 등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등의 크기로 자기에게 돌아올 복의 크기를 재거나 연등행렬의 장관으로써 신심의 충족을 추구할 뿐, 연등과 그 행사의 의의를 이 날만으로도 깊이 생각해 보려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매일 부처님 앞에 나설 수 없을 바에야 이런 축일에 부처님을 찾는 것이 결코 무의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등을 달고 불상 앞에서 수십 번, 수백 번 절을 하면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염원하는가. 대개는 자신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고 그 소원이 옳고 그른지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등을 달고 절하는 그 자체로써 뭔가 잘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등을 달고 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함은 물론 널리 전하여 이 세상을 두루 밝히겠다는 다짐이다. 등燈이라는 말이 가장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 예는 제8문에서 설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이다. 등이라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므로 불교에서는 이를 지혜에 비유하고, 불전에 등을 켜 바치는 등공양을 향공양과 아울러 매우 중요시하여 왔다. 연등행사에서는 연꽃 모양의 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가 취하는 기본입장을 잘 상징해 주는 것으로는 연꽃 이상의 것이 없다. 연꽃은 진흙바탕의 지저분한 못에서 자라면서도 그 청결함과 아름다움을 결코 잃는 법이 없다. 모름지기 보살은 연꽃과 같이 살아야 한다. 세속에서 온갖 중생과 더불어 살면서도 세속의 때에 물듦이 없이 오히려 그로 인해 주변을 아름답게 비춰야 한다. 결국 이 때의 연등蓮燈은 불교인의 개인적 자세와 사회적 자세를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의 불전에는 연등의 의의를 강조하는 대목이 많이 있지만, 연등 행사의 유래와 그 의의를 설명하고자 할 때면, 대개 ‘가난한 여인의 등불’에 관한 이야기를 든다. 비록 보잘것 없는 등이었지만 가난한 여인이 정성껏 부처님께 공양한 등불은 아무리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등불을 끄려 애쓰는 아난다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말한다. “아난다야,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등불이다. 그러니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등불의 공덕으로 그 여인은 오는 세상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이 밖에 연등불燃燈佛이라는 부처님이 석가모니가 성불할 것임을 보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등의 의의가 그만큼 중요하였으므로 일찍이 연등의 의례는 법회로서 일반화되어 그 형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연등의 의례가 법회화된 것이 연등회 또는 관등회觀燈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에 연등회가 실시된 기록이 있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적 행사로서 실시되었다. 잠시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고려시대 전기간에 걸쳐 매년 성대하게 실시되었던 연등회는 호국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고려 태조의 유명한 훈요10조에서는 “부처님을 섬기기 위하여 연등회를 행한다”고 하였지만, 이후 이 행사는 민심을 이끌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응용되고 조상숭배의 사상이 끼어드는 등 세속적인 신앙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또 이 행사가 있을 때에는 지나칠 정도로 주연이 벌어져 본래의 취의가 전도되었던 경우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결국 연등회는 호국적인 조상숭배의 의식이 되었다. 이런 국가적 연등회는 정월 보름에 실시되었다가 나중에는 대체로 2월 보름에 실시되었던 것으로서, 부처님 오신 날인 사월초파일의 연등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사월초파일의 연등행사는 고려말인 공민왕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고 한다. 이 날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왕이 직접 절에 행차하여 진행했으면, 금주령이 있을 때도 이 날만은 예외를 허용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연등회가 중시되었음은, 연등회의 제반 사무를 관장하는 국가부서로서 연등도감이라는 것까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는 배불정책과 불교교세의 쇠퇴와 더불어 연등회가 금지되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의 기복은 있었으나, 대체로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즉, 국가적으로는 환영되지 않았지만, 민속행사로서는 꾸준히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불교행사로서의 참뜻을 잃고 전도되었던 고려시대의 연등회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를 배척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상징으로서의 등이 간직한 불교적 의의를 되새기지 않으면, 그 행사의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연등회는 존재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 고려시대의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등을 통해 복을 빌고자 하는 생각이 잘못일 수는 없지만, 앞서 말한 대로 등을 밝히는 보다 더 크고 깊은 의미를 피부로 느낄 때 불교인으로서의 자각과 사명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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